칠순이라니? 아들의 권유로 푸껫으로 칠순 기념여행을 다녀왔다
‘칠순’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먼저 멈칫했다. 숫자로만 보면 인생의 큰 고개를 하나 넘었다는 뜻인데, 정작 내 마음은 아직 그 자리에 가 있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은 분명히 세월을 품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오늘 할 일을 걱정하고 내일을 계획하며 사는 젊은이 못지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이번 칠순에는 여행 가요. 멀리.” 그 말이 이상하게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라는 권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행지는 푸껫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따뜻하고 먼 나라였다. 사실 처음엔 망설였다. 비행시간도 길고, 언어도 다르고,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 굳이 해외까지 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단호했다. “엄마가 지금 안 가면 언제 가요. 마침 회사에서 항공권을 단체할인으로 풀었으니 비용 많이 안 들어요" 그 말에 더는 사양치 못하고 나는 ‘칠순 기념여행’이라는 명분을 안고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그리고 동갑내기 사부인과 함께 푸껫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된 손자가 긴 시간을 잘 견딜까 걱정도 되었으나 탈없이 잘 견디어냈다.
푸껫 공항에 내리자 가장 먼저 공기가 달랐다. 한국의 계절과는 전혀 다른, 습하고 따뜻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햇볕은 과했고, 바람은 바다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어느 해 인가 대만을 여행할 때 춥지 않은 나라라서 추위대비를 모두 하지 않고 갔다가 추위에 떨었던 기억 때문에 며느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의 한벌을 슬쩍 챙겨 온 것이 내심 부끄러웠다 ‘아, 내가 정말 먼 곳까지 왔구나.’라는 생각이더니 마음 한편에 넓은 운동장이 생긴듯했다. 늘 익숙한 동네, 익숙한 풍경 속에서만 살다가 전혀 다른 공간에 발을 딛는 경험은 생각보다 큰 위안이 되었다.
숙소에 도착한 첫날. 세 개의 룸으로 나눠서 각기 여장을 풀고 고급진 부패가 있는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사부인과의 동행이 조금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었으나 전혀 기우였었다는 것이 기뻤다. 닮은 점이 많은 동갑내기 할미들이었다 살아온 날들을 이야기하다 보니 친구 같은 친근함이 우리를 포근하게 했다. 푸껫 바다의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왔다가 물러났고, 우리는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을 바쁘게 살아온 우리. 가족을 챙기고, 일을 하고, 집안을 돌보며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살아왔던 우리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해방감에 한없이 여유로워졌다. 그것이 이 여행이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장면들이었다. 푸껫의 과일 중 가장 독특하다는 두리안을 체험해 보기 위해 재래시장에 갔다. 망고 같기도 하고 자몽 모양 같이 생긴 과일, 맛은 우유맛이 나면서 바나나처럼 달콤했다. 꼭 셔벗 같기도 했다. 그러나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쥐는 바람에 미안한 맘에 머쓱 해졌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손자가 먹어보겠다고 도전장을 내며 할미 편이 되어주어서 얼마나 반갑고 고맙든지. 맛있는 과일이 어째서 냄새는 이렇게도 고약한지 참으로 신기했다. 아침마다 푸짐한 과일들, 취향껏 골라 먹을 수 있는 다양한 디저트들, 이름 모를 현지 음식의 낯선 향, 호텔 라운지에 나와서 편한 자세로 앉아 담소를 나누는 시간, 대접받는 사람들의 느긋함, 여유로움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아 맘이 설레었다. 호텔 앞을 오가며 자신들의 일에 바쁜 사람들, 선량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하던 사람들,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 그 모든 것이 지구촌 어느 곳에서든 사람 살아가는 삶의 모양이 똑같다는 생각에 왠지 애잔한 맘이 들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영원히 깃들기를 빌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늘 다음 일을 생각하며 살았는데, 푸껫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를 수 있었다.
아들과 나란히 걷는 시간도 새로웠다. 늘 부모와 자식이라는 역할 속에서만 마주하던 관계가, 여행지에서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아직도 아들이 품속에 있던 시절의 아이로 보였었는데 이곳에서의 아들은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로 서있었다. 속도를 맞추며 걷기 위해 애쓰는 아들의 모습에서, 어느덧 나는 칠순의 할머니가 되었고 아들은 나의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자라면서도 장남이라는 자의식이 강했던 아들이다. 가난했던 시절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이, 어린 동생들이 늘 안쓰러웠던 정 많은 장남이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칠순이라는 숫자는 그동안 내가 잘 살아왔다고 새겨진 이정표일지도 모른다. 정직하게, 성실히, 게으르지 않고, 사람으로서의 주어진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왔다. 잘 살았구나 그리고 이 나이에도 새로운 곳에 와서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구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이 찡해졌다. 이 여행은 칠순을 살아낸 엄마에게 아들이 건네는 감사의 표현이었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건강하게 살아가 주시라는 간절한 부탁이라 느껴졌다. 칠순이라서 떠난 여행이었지만, 나를 다시 만나서 이후에 살아갈 새로운 삶의 자리를 제시하고,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보여준 보배로운 시간이었다.
이제 누군가 내게 칠순 여행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생각보다 괜찮고, 생각보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