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엄마가 남기신 수첩

반응형

엄마의 수첩에서 배운 삶의 지혜

집 안 정리를 하다 오래된 서랍 하나를 열었다.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이 겹겹이 쌓여 있던 그 안에서, 나는 엄마의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 모서리는 다 닳아 있었고 표지는 햇빛에 바래 있었다. 새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엄마가 늘 가방 속에 넣어 다니던 바로 그 수첩이었다. 무심코 첫 장을 넘긴 순간,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안에는 엄마의 하루, 엄마의 생각, 그리고 엄마가 살아온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수첩에는 거창한 말은 없었다. 성공에 대한 다짐도, 누군가를 탓하는 문장도 없었다. 대신 아주 짧고 담담한 문장들이 페이지마다 적혀 있었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 것.” “말이 날카로워질 땐 침묵이 낫다.” “괜히 서두르지 말기.” 처음에는 왜 이런 말들을 굳이 적어 두었을까 싶었다. 하지만 한 줄, 또 한 줄 읽어 내려갈수록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수첩은 엄마가 세상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건네던 작은 약속들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늘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힘든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고, 아픈 마음도 티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수첩 속 문장들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기분 나쁜 말을 들은 날엔, 집에 와서 차 한 잔 마시고 마음을 먼저 가라앉힐 것.”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엄마도 상처받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다만 엄마는 그 상처를 밖으로 터뜨리기보다 조용히 정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감정을 바로 쏟아내기보다, 한 박자 쉬는 법을 엄마는 오래전부터 연습하고 있었다.

수첩 중간에는 돈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숫자만 적힌 가계부가 아니라, 돈을 대하는 태도가 담긴 문장이었다. “비싼 물건보다 오래 쓰는 물건이 좋다.” “아끼는 건 참는 게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것.” 어린 시절, 엄마가 늘 같은 코트를 입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 선택이 단순한 절약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었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엄마는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에게 늘 물으며 살았던 사람이다.

사람에 대한 문장도 많았다. 특히 이런 문장이 눈에 오래 남았다. “사람에게 상처받았을 때, 그 사람 말고 나를 먼저 돌볼 것.” 엄마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받는 날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을 더 단단히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누군가의 말에 나를 맡기지 않고, 내 마음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일러 주었던 것이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그동안 얼마나 쉽게 타인의 말에 흔들려 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건강에 관한 메모도 있었다. “아프면 다 미뤄도 된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기.” 엄마는 늘 가족을 먼저 챙기느라 자기 몸을 뒤로 미뤘다. 그런데 수첩에는 그런 삶을 스스로 경계하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다. 엄마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으면 결국 아무도 제대로 돌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문장은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다.

수첩의 마지막 장에 가까워질수록 문장은 더 짧아졌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 하루, 그래도 잘 살았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엄마에게 삶이란 늘 완벽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무사히 건너는 일이었음을 그 문장은 말해 주고 있었다. 잘 해냈는지보다, 버텨냈는지가 더 중요했던 삶. 그 속에서 엄마는 매일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나는 가끔 그 수첩을 다시 펼친다. 마음이 복잡할 때, 이유 없이 지칠 때,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를 때. 엄마는 옆에 없지만, 수첩 속 문장들은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천천히 가도 된다.” “오늘 할 수 있는 만큼이면 충분하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나를 붙잡아 준다.

엄마의 수첩은 누군가에게는 낡은 메모장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운 가장 현실적인 교과서다. 큰 말 없이, 과장 없이, 하루를 살아낸 사람의 기록. 나는 그 수첩을 통해 배운다. 삶은 늘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고, 잘 사는 기준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도 마음속으로 조용히 적어 본다. “오늘은 오늘로 충분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