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함께 즐긴 사보타주 게임.

가족이 함께 즐긴 사보타주 게임
큰애네 식구가 연말연시를 맞아 집에 왔다. 7살 손자, 12살 손녀, 며느리, 그리고 우리 집 장남. 고맙게도 가급적 시간만 나면 내려와 함께하곤 하는 장남이 늘 대견하다. 항상 그렇듯이 온 가족의 입맛에 맞게 구색을 맞춰 장을 봐오고 애들은 애들 데로 어른은 어른 데로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재치 있게 차려준 밥상에 감탄하고 흡족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사보타주게임이다"하고 반가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아들이 준비해 온 도구들을 꺼내 놓았다. 손자 손녀는 벌써 신이 나서 삼촌곁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삼촌의 손놀림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드게임은 몇 번 해본 적 있지만, 사보타주 게임은 처음 나온 게임 인가보다. 이름부터가 묘하게 긴장감을 만들었다. 서로 협력하면서도 누군가는 방해꾼일 수 있다는 설정이란다. '방해꾼이 있는 놀이라 가족끼리 해도 괜찮을까' 잠깐 망설였지만, 결론을 말하면 많은 웃음과 의외의 진실이 넘쳐 나온 시간이 됐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각자 카드를 나눠 들었다. 누가 광부인지, 누가 사보타주인지 아무도 모르도록 각자의 비밀이 됐다. 마치 화투패를 받아 든 것처럼. 그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평소 가장 순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의심스럽게 보이고, 말수가 적은 가족은 괜히 수상해진다. “왜 그렇게 웃어?”“너 아까 길 막은 거 일부러 지?”이런 말들이 오가면서 평범한 탁상이 순식간에 심리전의 현장으로 변했다.
초반엔 다들 조심스러웠다. 괜히 의심했다가 분위기 망칠까 봐, 도와주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산을 했다. 누가 길을 잘 이어주고 있는지, 누가 애매하게 카드를 내는지. 그런데 게임이 몇 판 지나자 본성이 슬슬 드러났다. 평소 리더십 있는 가족은 역시나 전략을 짜고, 평소 장난기 많은 사람은 쓸데없는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려 의심을 샀다. 특히 가장 재미있었던 건, 끝까지 선한 얼굴을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사보타주로 밝혀진 순간이었다. 다 같이 동시에 “설마!”를 외치고, 그 사람은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 그랬잖아.”
사보타주 게임의 묘미는 단순히 이기고 지는 데 있지 않다. 서로를 얼마나 잘 안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실제로는 얼마나 오해하고 있었는지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누군가는 너무 빨리 믿고, 누군가는 끝까지 의심받는다. 그 과정에서 서운함이 생기기보다는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아, 너는 이런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하는구나”라는 새로운 발견 때문이다.
게임 중간중간 감정이 살짝 올라오는 순간도 있었다. “왜 나만 계속 의심해?”라는 말이 나올 때, 잠시 분위기가 멈췄다. 하지만 그마저도 게임의 일부였다. 잠깐 쉬고 웃으며 다시 시작하자, 그 말은 농담이 되고 에피소드가 됐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종종 이유 없이 의심받거나 오해받는다. 그걸 안전한 놀이 안에서 경험해 본다는 점에서, 이 게임은 생각보다 깊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세대 차이가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똑같은 수준의 생각, 방법, 요령 등이 맞아떨어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이, 역할, 평소의 관계가 게임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부모도 아이에게 속고, 아이도 어른의 연기에 넘어간다. 그 평등함이 묘하게 즐거웠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다 같이 웃었고, 실패한 전략에 다 같이 아쉬웠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광맥을 찾아 굴을 뚫어가는 각각의 광부들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남았다. “다음엔 역할 바꿔서 해보자”“아까 그 장면 진짜 웃겼어”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사보타주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가족 사이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열어주는 장치였다. 억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아도, 웃고 의심하고 속고 풀어지는 과정 속에서 충분히 가까워졌다는 것.
가족이 함께하는 사보타주 게임은 완벽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약간의 오해, 약간의 억울함, 그리고 그걸 덮는 큰 웃음. 현실과 닮아 있지만 현실보다 안전한 공간.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알게 되고, 조금 덜 심각해졌다. 아마 그래서 게임이 끝난 뒤에도 마음이 따뜻했던 것 같다. 이건 분명 게임이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승패가 아니라 함께 웃었던 얼굴들이었다